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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초를 켜는 밤
Date 2023.07. 25 / Editor 버들 (@beoddle)
장마가 이어지는 나날들이다. 아니, 이제 기간을 예측하여 장마라고 하지 않고 우기라 부른다고 하니, 앞으로는 물 속에 잠긴 것 같은 날들이 더 오래 이어질 것인가보다. 이런 때에는 어두워지는 시간을 기다려 밀랍으로 만든 초를 태운다.

밀랍으로 초 만들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틀도 필요 없고 그저 낡은 냄비 하나와 밀랍, 그리고 심지만 있으면 된다. 깊은 냄비에 밀랍을 녹여 심지를 수직으로 푹 담갔다 빼서 굳히는 과정을 초가 원하는 굵기가 될 때까지 반복한다. 처음에는 빼빼로만큼 가늘었던 노란 빛깔의 초가 이 과정을 반복해 손가락만한 굵기가 되면, 종이호일을 깐 쟁반 위에 눕혀둔채로 이틀 정도 완전히 말린다. 매끈하지 않고 조금 울퉁불퉁하거나 휘어져도 내가 사용할 것이니 문제 없고, 오히려 손으로 만든 물건의 느낌을 그대로 담고 있어 정겹다. 완성된 초는 작은 상자에 차곡차곡 챙겨 넣어 둔다. 가득 찬 초 상자를 보면 한동안은 마음이 든든하다. 밀랍을 녹일 때 온 집안에 퍼진 달콤한 향기는 미미하게나마 여러 날 남아있다. 만들어진 초로 가득한 상자 외에도 초 만들기에서 좋아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초에 불을 붙이면 고요하고도 밝은 빛이 공간에 가득 찬다. 너울너울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노라면 여러 생각이 드는데, 그 중 오늘은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이들을 떠올린다. 바쁘고 늘 빠듯한 생활은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가는 일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게 만든다. 나의 경우에 그것은 내 안에 가득한 다정함을 표현하는 일이다. 이런 시간에는 애써 꾹꾹 눌러두었던 그것을 꺼내어 본다. 

밀랍초 한 개, 혹은 두 개가 타는 시간동안 편지를 쓰거나 좋아하는 글을 필사하거나 이미 몇 번씩 본 영화를 다시 본다. 촛불이 사그라지고 나면 보송해진 집안 공기만큼이나 마음이 한결 가벼워져 있다. 그리고 곧 밝아올 내일 아침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겠다, 비로소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악세사리 브라운 색상 이미지-S59L3
‘차와 닮은 삶’ 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고 느꼈던 차와 닮은 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글, 이미지, 영상, 사진 무엇이든 좋아요. 이것도 차와 닮은 삶이지 않을까? 라는 작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